힘들 때 도망치는 것은 좋을까?
일단 '힘들다+도망치다' 부정적인 두 단어가 만나서 일단 거부감이 든다. 만화에 많이 나온다. 도망치는 캐릭터=비겁한 사람, 힘들지만 맞서 싸우는 캐릭터=정의롭고 용감한 사람. 우리는 이런 이미지에 길들여져 있어서 "도망"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이 무조건 나쁠까?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첫 수능을 치고 모두 교대만 지원했었는데, 모두 떨어졌다. 같은 점수였던 친구는 합격하고 나는 떨어진 학교도 있다. 면접이 문제였을까? 재수를 할 때 나는 글도 잘 못 쓰고 말도 잘 못하니 논술과 면접이 없는 곳을 정말 열심히 찾았다. 그런데 딱 수능 100%만 보는 그런 곳이 있었다. 생긴지 딱 3년 되던 성균관대 영상학과.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는 학과를 내가 필사적으로 찾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와... 재수를 하면서 '교대가 내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매일매일 고민했다. 지겨운 공부를 피해 내가 달아나던 곳은 영화관이었는데, 그렇게 나는 영화 관련학과에 지원하기로 마음 먹었고, 딱 수능만 보던 성대 영상학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딸이 선생님이 되었으면 하던 아빠는 내가 교대가 아닌 다른 곳에 지원하겠다고 하자 베란다로 나가 끊었던 담배를 피셨다. 나중에야 한 군데만 빼고 나머지는 교대에 넣겠다고 타협을 보았고, 다행히 영상학과 빼고 다 떨어지는 바람에 재협상은 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은 내 운명이 아니었다)
영상을 전공하게 되면서 나에게는 영상편집이라는 practical skill 이 장착되었다. 재수를 하던 그 시절, 내가 영화관으로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논술과 면접을 피해 도망갈 다른 곳을 찾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만족하는 일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모든 경우가 좋은 결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도망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물러서지 말고 싸우거나 버텨내야 할 때도 있다. 결과가 안 좋았더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 판단을 했어야 하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망치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보다는 매 순간 판단을 잘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지혜란 것은 당장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쪽집게 같은 운이 아니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지금 잘 안되더라도 나중에는 잘 될 수도 있고, 지금 잘 되더라도 나중에는 잘 안될 수도 있다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가까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하는 아들에게 뭐라고 해야할까? 벌써부터 자기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초3 아들을 보면 뭐라고 해야하나?
결국 상황에 대한 판단은 본인이 하고 스스로 책임지면 된다. 내가 할 일은 '그건 안돼!'라고 하는 것 보다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상황들을 아이들이 자주 마주치고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나는 가끔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피던 아빠의 모습이 생각난다.
[30일 글쓰기] #13. 힘들 때 도망치는 건 도움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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