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7. 1. 23. 21:03

관악구에서 초등학교 3학년 부터 살았다. 결혼하고는 6년을 더 살았다. 

너무나 익숙하던 이 동네를 떠나니 그동안 친숙해진 것들과 단 칼에 자르듯이 관계가 끊어지는 느낌이다.

 

자주 가던 동네빵집과 아이들 사정까지 잘 알던 짠하던 미용실, 아이들 이름도 다 외우던 소아과, 아이들이 얼룩진 옷을 깨끗하게 해주시던 세탁소 아줌마, 비올 때 우산을 빌려주고 농사지은 토마토도 주시고, 이사간다고 하니 너무 아쉬워하던 단골 커피숍, 아이들의 미술학원과 태권도학원, 그리고 어린이집까지...


특히 우리는 이 어린이집을 꽉 채워 5년을 매일 같이 다녔는데,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떠난다고 마냥 아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떠나서 홀가분한 마음도 들었는데, 그 이유는 지난 9월 초에 있었던 한 사건 때문이다.


당시 어린이집에서 원장선생님이 컨트롤할 정도를 넘어선 대형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내가 어린이집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사건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일주일 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생길 그 어떤 일말의 사건의 소지도 만들고 싶지 않다)

수현이네 반 학부모들에게 확인 전화를 했고, 상황을 설명했고, 수민이네 반 엄마들 몇몇과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서로 입장을 조율했다. 원장 선생님과도 오랜 시간 이야기했고, 또 당사자들과 삼자대면을 하고, 툭 건들기만 해도 눈물을 쏟는 선생님을 위로했다. 구청에도 전화를 했고, 교회 집사님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위원회를 열어 내가 직접 진행을 하고, 70명이 넘는 어린이집 학부모 전체에 "위원장이 보내는 글"을 적어 보냈다. 문서는 남편이 초안을 작성했고, 내가 수정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남편은 의지가 많이 됐다) 


이 모든 일이 일주일 동안 이루어졌는데, 나는 이 일주일 동안 일년 동안 할 말을 다 쏟아낸 것 같다. 목감기에 걸렸었는데, 점점 더 심해져 목소리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억지로 계속 이야기를 해야 했다. 애증의 일주일이 지나 결국 사건은 잘 봉합이 되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대표자라면 철저하게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또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엄청나 보이던 사건도 들어주는 자세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똑똑한 척 혼자 사건을 해결하기보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것.


이 때 내 목소리를 듣고 커피숍에는 내가 너무 안쓰럽다며 커피숍에서는 따뜻한 레몬차를 서비스로 주셨었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 맛은 더 감동이었다...


어쨌든,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나는 이미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했고, 이후로 여러 엄마들을 신경쓰다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우리 이사 날짜 다가오던 것이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그래도 세 아이 모두 이 곳에서 친구들을 처음 만나 아기때부터 같이 자랐고, 나도 엄마들이랑 친분이 두터워졌고, 위원장도 약 2년을 했는데, 그냥 떠나기엔 인연이 너무 깊었다. 그냥 훌쩍 떠날 수는 없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이가 셋이니 준비해야 할 선물도 50개...

저렴하면서도 실속있으면서도 엄마와 아이 다 좋아할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계속 지나갔다.


이틀 전에야 줄넘기로 결정을 하고 주문하려고 했더니, 택배 도착 시간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전 날 직접 사러 홈플러스에 갔는데, 인터넷에서 본 물건 값보다 2배 이상에다가 물량이 9개밖에 없었다는... 홈플러스 안을 배회하면서 뭘 살 까 고민하던 중에 친정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동대문으로 가자고.


엄마랑 데이트도 할겸 동대문으로... 결국 창신동 문구센터까지 가서 줄넘기, 장갑, 마스크와 과자를 각 반에 알맞게 골라서 구입했다. 엄마는 안 써도 되는 돈을 쓸데없이 쓴다고 했지만, 나는 이럴 때 안 아끼고 쓰려고 돈을 번다.

 

친구들에게 준비한 선물들

일일히 포장하기 힘들어서 작은 메세지만 붙였다.

(수민이 친한 남자친구들 다섯명만 줄넘기라 그것만 포장)


어린이집 마지막 날 하원 때는 아이들과 나보다 선생님들이 많이 우셨다. 특히 지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수현이네 반 선생님이 너무 흐느껴 우셨는데 나까지 눈물이 났다... 나는 선생님들께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는데, 선생님들마다 선물을 준비해 주셔서 죄송하고 감사했다.

손자를 하원시키려고 현관에서 기다리시던 한 할아버지께서는 나더러 왜 이렇게 인기가 많냐며 국회의원에 나가라며.. ㅋㅋ 

이렇게 어린이집과는 이별을 했다.


태권도 관장님께도 따로 인사 드렸다. 수민이는 태권도 관장님이 라면을 제일 좋아한다며 평소에도 사드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박스를 사다드리기로 했다. 재밌었던 건, 수민이랑 태권도 건물에 있는 마트에서 컵라면을 고르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 라면을 사러 내려오신 관장님과 딱 마주쳐서 관장님이 민망해 하시기도 했다. ^^

 

같은 빌라 건물에 살던 여덟 집에도 방문해서 약소한 선물을 드리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평소 아이들도 예쁘게 봐주셨고, 아이들 시끄럽다고 불평 한마디 듣지도 못했다. 201호 할아버지는 아쉽다고 아이들 간식도 잔뜩 사다주시고, 601호 아주머니는 고구마 한박스를 가져다 주셨다.^^

 

이렇게 bye-bye인사는 끝!

처음 시작을 잘 하기도 어렵지만 잘 끝을 맺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인사할 곳이 많다보니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 점점 숙제같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고 나니 마음은 편했다.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또 사람 인연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이사온 지 한달이 지났는데, 정이 많은 수민이는 지금도 태권도장과 전 어린이집이 그립다며 가끔 꿈을 꾼다고 했다. 관장님이랑 태권도장에 꼭 놀러오기로 약속했는데 언제 가냐고 성화고...

그래서 2월에 한번 놀러가기로 했다. 365어린이집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서울시민이 아니라 이용할 수가 없다고 해서 그냥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친구 집으로 놀러가기로 했다.

 

한 곳에서의 오랜 시간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경험이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지표가 된다. 당분간은 너무 많은 것에 연류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지만, 수민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또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다. 

기대보다는 사실 걱정이 되지만, 여기서도 좋은 이웃들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사람사는 게 다 비슷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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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mber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