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물건-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쓰던 일기장 33권-이 있다. 


블로그에 이미지 첨부를 하기 위해 베란다 구석 상자 깊숙히 있는 일기장을 (아주 귀찮지만) 꺼내 보았다.  1학년 때 쓴 일기장은 벌써 30년이 되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난다. 이 일기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 남은 나의 집착의 결과물이자 졸꾸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대략 이정도...


오랜만에 일기장을 꺼낸 김에 저학년 때 썼던 일기 몇 개가 재밌어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저학년 때는 확실히 솔직했는데, 고학년이 될 수록 가식적이 된다. 특히 6학년에는 일기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이름도 지어주고 대화체로 썼는데 도저히 오글거려서 못 찍었다...


나는 내 짝꿍이 하루라도 안 왔으면 좋겠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안 싸우길 바란다

사라는 못했고 다른 아이들은 참 잘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비의 집을 갖고 싶었는데 책을 받은 슬픈 이야기


일기장과 관련된 나의 집착을 보여주는 두가지 기억이 있다.

기억1) 초등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쯤. 일기를 한참 쓰다가 맨 위에 한 줄을 비우고 썼다는 걸 알았다. 그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법칙이 있는 줄 알았다. 바닥에서 누워서 울면서 그날 쓴 일기 전체를 지우개로 지웠다. 옆에서 엄마가 '지우지 않고 그냥 써도 되~'라고 하는데 나는 안 된다며 엉엉 울면서 지우고 새로 다시 썼다. 그 부분 일기장을 찾아보았는데 못 찾았다. 

기억2) 초등학교 6학년 말. 선생님이 지금까지 쓴 일기장을 모두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 같다. 각 분단 맨 뒤에서부터 일기장을 걷던 중이었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옆 분단에 수북히 쌓인 일기장을 보고 순간 '나보다 일기를 더 많이 쓴 사람이 있어?' 하고 질투를 했다. 알고보니 그 수북한 일기장은 옆 줄 전체를 걷어온 만큼의 양이었고, 내가 쓴 33권의 일기장이 그 양보다 많다는 걸 알고 묘한 전율을 느꼈다.


나는 왜 이렇게 일기를 열심히 썼을까?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건 그 나이에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엄마는 항상 다운증후군인 남동생을 따라다니느라 지쳐있었고, 엄마 아빠는 자주 다투셨다. 행복한 기억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부도 어떻게 하는지 몰랐고 어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일기쓰기와 책 읽기를 참 열심히 했다. 내가 이 두가지를 좋아하고 잘 했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나는 책을 도피처로, 일기를 나의 분출구 삼아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래서 행복한 기억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불행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내가 지금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도 책 읽기와 일기쓰기다. 읽기와 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하라고 잔소리를 하긴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며 내 어린 시절이 무의식중에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나와 다르게 일기쓰기를 아주 힘들고 귀찮아 하는데, 이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차이일 가능성이 크다) 글씨는 왜 이리도 날아다니는지... 


큰 아들 1학년 일기 (2년 전)... 그러나 내용은 재미있어서 찍어놨던 일기


제목: 꿈

                                                     -쓴 사람: 이수민

꿈을 꿨다. 꿈에서 내가 일어났다. 그런데 나만한 햄버거, 소시지 등등 음식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왜 싸우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음식들 반이 모두 날 공격했다.

팀이 나누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음식 vs 음식이 돼었다. 나와 다른 음식들이 갇혀있을 때

어떤 음식이 벽을 부수고 왔다. 우리팀이였다. 나는 엄마 방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들켜서 잡혔다.

내가 아까 숨어 있을 때 봤는데 그 음식들이 풍기는 냄새를 맡으면 자기 팀이 돼는 음식이였다.

그런데 내가 그애한테 잡혔다. 그래서 난 숨을 참았다. 꿈 속이라 그런지 힘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팀이 된 척을 했다. 그리고 내가 우리팀을 공격하려고 하는 순간 내가 꿈에서 깼다.

다시 자고 싶어서 그 다음 이야기를 알고 싶다. 그런데 시간이 8:00 였다. 그래서 더 못 잘 것 같다. 끝.



도저히 쓸 이야기가 없다며 꿈 이야기를 쓴 것이다... 오랜만에 꺼낸 일기를 보면서 나는 내 아이와 30년 전의 말 잘듣던 나를 비교하고 있다.




Posted by kimber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