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수민이가 몇 주 전에 칠판에 써 놓은, 엄마에게 보내는 메세지다.
"엄마 이제부터 화낼 때마다 안 용서해줘"
나는 정말 화를 안 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고...
아이가 이렇게 쓸 정도면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나는 화를 자주 내지 않지만, 가끔 아이들에게 배 밑바닥에서부터 힘을 끌어당겨 소리를 지르곤 한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수 십번 좋게 이야기 해도 아이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거나, 아이들 목소리에 내 말이 묻혀서 안 들려서 더 크게 말해서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가피하다고 해도 화를 내고 나면 안 좋은 영향이 더 크게 미친다.
나만 해도 그렇다. 평소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내가 안쓰던 괴성을 지르고 나면 나도 힘이 빠지고, 기분이 다운된다.
나뿐 아니라 아이들도 싸울 때 내가 화내는 모습과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특히 문제는 내가 화를 내는 대상이 주로 수민이라는 거다.
예를 들면, 오전에 등원할 때 먼저 준비한 수민이는 계단으로 혼자 내려가서 1층에서 기다리고 있고 싶어하는데, 형이 나가면 준비되지 않은 동생들도 우르르 나가려고 한다. 꼭 외출하려고 할 때 똥을 누는 수빈이는 발가벗고 나가겠다고 뗴를 쓰고, 결국 그 소란을 시작하게 한 수민이가 대표로 내 화를 감당해 내야하는 식이다.
그래서 수민이가 저렇게 글로 남긴 거겠지만.
아이들에게 화내기 전에 대화를 통해 해결하라고 하지만 어떻게 애들을 키우면서 화를 안 내지? 소리를 안 지르고 애들을 키울 수 있어? 사실 육아 책이나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는 실제 육아와 너무나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화에 대해 자각한 이후로 의식적으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더니 이게 통한다는 놀라운 사실!
최근 소리를 지르지 않고 거의 한 주를 평화롭게 지냈다. (물론 조금 강하게 이야기 할 때는 있지만)
수민이가 화를 내거나 하면 "어? 그런데 왜 화를 내? 엄마도 화 내지 않고 있잖아." 하면 "아! 맞다!"" 하면서 웃는다.
그러다 어제 두 번 소리 질렀다... 수빈이가 식탁에 올라가 물이 담긴 컵을 사방에 뿌렸고, 물바다가 된 바닥을 닦는 사이에 식탁에 앉은 수민이가 발로 의자를 건드려서 의자 등받이가 내 머리로 떨어짐...
어제에 이어 오늘도 화를 냈다. 오늘은 괴물놀이에 심취한 수민, 수현이가 점점 과격해지길래 "하지마앗!!!!" "그만해엣!!!!" 소리를 질렀으나 오히려 둘이 킬킬 거리고 웃더니 결국 수민이가 던진 책 모서리에 수현이 손등이 맞아 수현이가 대성통곡을 했다... 수민이에게 버럭하며 혼을 냈더니, 수현이는 자꾸 침을 묻히고 막대걸래로 자기를 떄리려고 했다며 성토한다. 결국 둘 다 혼났다.
놀다가 한 명이 다쳐서 울고 혼나고 안고 화해하는... 항상 반복되는 패턴...
자기 전에 엄마가 아까 화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수민이가 다음부터는 화내고 바로 사과를 하도록 하란다.....;;
근엄하게 혼내는 와중에 형들하는 건 다 따라하는 수빈이가 너무 웃겨서 사진을 찍고 말았다.. ㅋ
비록 화를 내긴 했으나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고상하게 육아하는 고지가 안개 속에서 멀리 '언뜻' 보인 것 같다.
이건 환상이었을까? ㅎㅎ 그래도 그 고지가 분명 있고,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화내지 않는 날이 지속되는 육아의 세계... 경험해보고 싶다.
....
어쨌든 이렇게 순간적으로 나는 화는 다스려야 하는 게 맞는데, 뭔가 잘못되었을 때는 어떻게 분노해야하는지.
이 글을 쓰고 나서 우연히 김수영 시인의 시를 접했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의 한구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정작 화를 낼 곳에 내지 않고 작은 일에 화를 내는 나에게 일침하는 것 같다.
무슨일이 생기면 나의 유익먼저 생각하고 손해보지 않고 살려고 하는 내가 누구를 뭐라 하겠냐마는...
뉴스를 볼 떄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리고 내 목소리는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것 같아 또 화가 난다.
두 가지 화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시간이 해결해 줄꺼라는 믿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곡차곡 마음에 담아 기억하고 있는 거다. 그 떄까지 제발 너무 망쳐놓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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