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이가 태권도를 다닌 지 1년 하고도 4달이 지났다.
처음 수민이는 어린이집의 같은 반 친구와 다녔는데, 그 친구는 몇 달 뒤에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수민이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참 잘 다녔다.
학부모 참관수업 (2016년 6월)
몇몇 조그만 사건들은 있었다.
친구가 자기 손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며 속상해하던 일도 있었고,
한 번은 태권도 시작 전에 초등학생 형에게 "야"라고 잘못 말했는데, 상대방 아이가 왜 형한테 '야'라고 하냐고 따지자 수민이는 순간적으로 안 했다고 했다가 거짓말쟁이로 몰렸다고 했다. 그 형과 친구에게 말로 공격당하고 (돼지가 등장하는 어떤 말이었는데 잊어버림), 그래서 구석에서 혼자 쪼그려 앉아 울었다던 이야기... ㅋ (관장님은 아이들 픽업에서 돌아오시는 중이라 못 보신 듯)
이 일이 있던 날, 집에 돌아와 내 품에 안겨 울었다. 이 일은 수민이에게 상처였는지, 이제 태권도를 안 가겠다고하더니, 그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풀어져서 또 잘 다녔다.
이런 일들이 초반에는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다툼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맛있는 것도 나눠먹고, 형들이 게임이나 바둑하는 걸 구경하면서 친해진 것 같다. 바둑 두는 걸 등 너머 배워오더니 이제는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랑 바둑도 둔다. 소풍도 매 달 꼭 신청을 해서 신나게 놀다온다.
태권도 소풍~
(놀이기구 재밌었다고 하더니 혼자 얼었음)
수민이가 여섯 살이던 작년 어느 날에는, 하원할 때 태권도 차량을 놓쳐서 혼자 집을 찾아온 적도 있다. 도장에서 형들이 게임하는 걸 구경하다 늦게 내려왔더니 태권도 차가 없어서 혼자 집까지 걸어왔다고... 씩씩하게 집에 와서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그 자리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짠하면서도 다행이었던 사건이었지만... 무엇보다 혼자 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그 뒤로 나와 길이 엊갈려서 허겁지겁 달려왔을 때도 혼자 태연하게 집에 용변을 보고 있었고,
가끔 친정집에 동생들을 먼저 데려다 주고 수민이를 데리러 오는 길이 늦었을 때는 혼자 집에 들어와 손 씻고, 발 닦고, 옷도 갈아입고, TV를 보고 있다. 이렇게 하라고 (그러면 TV를 볼 수 있다고ㅋㅋ) 미리 일러 주긴 했지만 너무나 기특하다. 내가 없으면 더 잘하는 것 같다.
태권도를 다니면서 (의도치 않게) 수민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신체 능력도 좋아지다보니 자신감이 많이 커졌다.
예를 들면 어린이집 같은 반에 친구를 신체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많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어린이집 상담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그 아이와 싸울 수 있는 아이는 21명 아이들 중에 수민이밖에 없다고 하셨다. 어디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다.
이사를 간다고 했더니, '이렇게 좋은 태권도가 어디에 있냐며' 어린이집에 대한 애착보다 태권도 때문에 이사를 가기 싫어할 정도...
그런데, 수민이가 태권도와 멀어지는 한 가지 사건이 생겼다. 이유는 국기원!
빨간띠 이후에는 국기원에 가서 승급심사를 통과해야 품띠를 딸 수 있다. 문제는 품띠를 따려면 1장부터 8장까지 모두 외워야 한다는 것. 내 눈에는 너무 복잡해 보이는 이 동작들을 7살 아이가 정확하게 외워야 한다고?
띠를 따기 위해 태권도에 다니는 것이 아닌데 이런 것으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승급심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사가 결정되고 생각해보니, 새로운 태권도장에 가게 되면 공인 인증된 품띠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1년 넘게 태권도를 배웠는데, 새로운 태권도장에서 흰띠가 될 수는 없다!
지난 7월에 신청을 했는데 수민이가 부담이 컸는지 미루고 싶다고 했다. 관장님은 할 수 있다고 시켜보자고 했지만, 내가 억지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관장님한테는 내가 너무 아이를 과잉보호하는 것처럼 비춰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때 나는 아이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보통 3개월마다 한번씩 국기원에 가고, 국기원에 갈 친구들은 한 달 전에 신청을 받는데, 수민이는 3개월 전에 신청한 셈이라 관장님이 수민이를 유독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 같다. 틀리면 혼을 자주 내고 엄하게 가르치신 듯... 이번에는 잘해서 꼭 통과하자고 하는 마음이셨겠지만, 수민이는 정말 많이 스트레스를 받았다.
특히 그 사이에 국기원의 승급심사를 하는 주체가 바뀌어서 심사가 까다로와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토요일에 품새특강을 하는 걸 가서 보면 한 동작 한 동작 까다롭게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승급심사 날이 가까워질수록... 품새를 하는 화, 목요일에는 (특히 관장님이 수업하시는 목요일에는) 전 날 밤부터 태권도에 가기 싫다며 울었다. 잘 못해도 괜찮다고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다. 한 번은 어린이집에서 태권도 가기 전에 태권도에 가기 싫다고 너무 운다고 선생님이 놀라서 전화를 한 적도 있다. 그 날은 결국 태권도에 안 가기도.
이렇게까지 품띠를 따야하나?
여기가 갈등의 포인트였다. 관장님 말씀대로 푸시를 해야하나? 그냥 또 순순히 취소를 해줘야 하나?
여러 날의 고민 끝에... 해보기로 했다.
삼개월 동안 수민이는 토요일마다 품새특강도 갔고, 이제 품새도 거의 완성됐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미 한 번 안 하겠다고 해서 들어줬는데 이런 상황이 다시 반복되다 보면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쉽게 포기하는 것이 습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힘들게 노력해서 얻는 성취에 대해서 느끼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10월 16일, 대망의 심사 날!!
(좀 좋은 카메라 가지고 가서 찍었으면 좋으련만. 흔들리고 너무 작고...ㅋ)
이 날 심사로 선택된 품새 1장... 8장까지 힘들게 외웠는데 1장.. ㅋ
(대련 심사하러 이동 중)
대련을 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두 번 찬 사람한테 관장님이 체크 20점을 준다고 했는데,
상품에 눈이 먼 수민이는 필사적으로 두번을 차는 데 성공했다.
작년과 비교하면 얼마나 의젓해졌는가!
불과 1년 전의 꼬마 수민이.. ㅋㅋ (2005년 8월)
이번에 나는 육아에서 중심을 잡는 경험을 한 것 같다.
아이의 말을 들어줘야 하나, 아니면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밀어붙여야 하나? 양 극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탔다. 어떻게 해야하나? 한번 경험으로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일단은 아쉬움이 덜 남는 쪽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수민이 말대로 국기원을 안 가고 이번에도 포기했으면 너무 아쉬웠을 것 같다. 시도해 보지도 않고 실패한 기어으로 남았을 듯. 품띠를 받은 수민이도 자긍심이 대단하다.
그리고 태권도 1장부터 8장까지의 연속시범은 수민이의 최고 장기가 되었다. 이제 각이 딱 잡혔다. ㅎㅎ
(잊어버리기 전에 동영상으로 찍어놔야겠다)
(코엑스에 놀러갔다가 공짜로 찍어준 잡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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