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의 1월 1일, 남편과 나는 새해의 첫 날이니 아이들과 함께 야심차게 외식을 하러 갔다. 목적지는 킹크랩집이었는데, 우리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윗집에 사는 청년들이 이곳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매일 집 앞에 킹크랩 트럭을 보면서 남편과 나는 언젠간 가보기로 했고, 그 날이 딱 신정날이었다.
킹크랩을 보고 아이들은 신이 났다. 우리는 야심차게 마음에 드는 한 놈을 골랐는데, 문제는... 킹크랩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 놈 하나가 20만원이 넘었던 것 같은데, 약 25만원이라고 해두자. (우리는 그날 외식비로 30만원을 지출했다) 남편과 나의 예산이 훨씬 뛰어넘은 금액이었는데 우리는 말하지 못했다. 너무 비싸서 못 먹겠다고.
남편과 나는 눈빛으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은 뒤돌아서 나오고 싶었지만, 우리는 그 말을 못하고 아저씨 뒤를 따라 들어갔다... ㅋㅋㅋ (윗층 아저씨라도 만났어야 되는데 못 만났다)
나의 비쌈의 기준은 20만원이다. 지난 글에서 돈 쓰는 데 구애를 안 받는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20만원이 넘어가면 급 소심해진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남편은 나를 가성비 여왕이라고 불렀던가? 하지만 아무리 가성비 여왕이라고 하더라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위에 언급한 "왜 말을 못해" 병이다. (비슷한 병명로는 '에이 그냥 사'가 있다) 이 병의 특징은 분위기에 잘 휩쓸리고 특히 돈을 쓰려고 마음을 먹은 날 잘 발동된다.
나의 장점은 내가 나의 이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위의 상황처럼 느닷없이 닥쳤을 때 휩쓸리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에서는 절대 이 병이 발동해서는 안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세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집을 계약하는 상황이라면, 1) 부동산 주인보다 더 그 집과 주변 환경에 대해 더 잘 알고 간다. 2) 사전에 무조건 그 자리에서 계약하지 않는다. 3)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확인한다.
위 세가지 조건을 생각해보니 "3)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확인한다"는 모든 구매시에도 유용할 것 같다. 사려고 하는 품목의 최대 금액을 정해 놓는다면 뒷감당을 걱정할 필요 없으니. 소비 품목을 세 단위(저가-중가-고가)로 나누어 보자.
저가: 신발 한 켤레는 나의 비쌈의 기준인 20만원이 넘지 않으면 된다.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야심차게 샀던 러닝화는 16만원이었다. 이 때 나는 '마라톤을 뛸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강하게 작동했다. ㅋㅋ (남편의 운동화의 경우는 10만원 이하로 내려간다.. 미안)
중가: 소파의 경우, 나는 돈보다 인테리어의 중요도(소파는 집의 중심이자 인테리어의 핵심이다)+오래 쓸 수 있어야 하고+ 오염도에 강하고, 튼튼해야 (세 아들 감안) 한다. 나는 버리는 것에 죄책감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래 쓸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소파는 최대 100만원이면 마음에 드는 것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고가: 차는 가격 외에도 여러가지 요소를 더 고려해야 한다. 지금 차가 너무 오래되서 (33만키로 찍었음) 다음 차를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관건은 환경 친화적인가? vs 아들 셋이 더 이상 싸우지 않도록 큰 차를 살 것인가 (뒷좌석에 셋이 앉으면 항상 싸움이)이다. 둘 다 충족하기에는 너무 비쌀 것 같고ㅠ 결국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차 가격을 잘 모르지만 4000만원을 잡으면 될까? 조금 더 비싸더라도 좋은 차를 사고 싶다. 이 가격 책정에는 그동안 낡은 차를 오래 타온 나의 억눌린 욕망도 감안되어있다.
글로 정리하다보니 내가 무엇을 살 때는 금액보다 다른 요소들이 더 많이 개입되는 것 같다. 돈보다 "내가 얻게 되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포기하기 싫은 가치가 존재하더라도 기회비용은 생각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쓸 수 있는 한계비용을 미리 정해 놓는다면 포기와 선택이 쉬워질 것이다.
2년 전, 킹크랩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되돌아서 나왔을까?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쓸 수 있었던 그날의 한계비용은 30만원이 적절했다. 우리는 다섯 식구인데다 그날은 새해 첫날 이었으니까! 그러니,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죄책감을 덜고 마음편히 먹고 싶다. ㅋㅋㅋ
[30일 글쓰기] #19. 차 한 대, 소파 하나, 신발 한 켤레에 쓸 수 있는 최대 액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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